이웃사랑과학♡이롬
  봄을 기다리며 숲을 생각하다


한때 나는 강진 바닷가에 흙과 돌을 사용해 초가집을 지었다. 십오 년이 지난 지금 그 집은 처음 그대로의 낮고 불편한 모습을 유지한 채 어느 모르는 이의 살림집이 되었다. 다만 널찍했던 마당에 새 주인이 전통찻집을 열어 먹고 살고 있다. 백여 그루의 유자나무와 백여 그루의 다래나무를 집 앞뒤에 심고 그 밖의 무슨 무슨 각종 나무들 삼백 여 그루와 함께 오년 가까이 살았던 흔적은 지금 대부분 없어졌다. 그 땅에 집들이 들어서 노래방이 되고 식당이 되고 민박집이 되었기 때문이다. 돌아보니 그 전에도 후에도 나는 주로 물가에서 살았고, 가는 곳마다 나무와 돌을 옮기며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크고 오래된 나무와 돌을 옮겨오지 않은 것은 마흔 초반 나이를 넘기면서부터이다. 타의에 의해 옮겨지는 나무와 돌의 입장을, 강제로 이주되는 것들의 마음을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나는 주로 씨앗을 땅에 심는 일을 좋아했다. 

  상추와 깨, 고추들로 작은 텃밭 농사를 지었으며 그 땅이 씨앗을 품고 해주는 일들을 적어두었다. 아프리카에서는 모래바람 속에 옥수수와 바나나나무를 심었다. 가장 즐거운 일은 손수 재배한 그것들로 음식을 만드는 일이었으며 아이들과 함께 대지를 걷고 노는 일이었다. 사막은 빈숲이었으며, 그 숲은 찬송과 예배가 가득한 곳이기도 했다. 가난한 아버지이며, 불쌍한 어머니이기도 했다. 

 이제 이순(耳順)을 눈앞에 두었다. 작살나무의 보라색 도는 열매를 먹는 산짐승들, 노루나 고라니 같은 것들의 어여쁜 눈망울을 생각하는 밤이다. 비자나무가 우거진 집 뒤의 숲이 궁금하다. 

  숲이라고 부를 때 혹시 우리는 숲을 커다란 솥단지나 아파트단지처럼 뭉뚱그린 하나의 덩어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숲이란 말은 하나의 단어라고 생각하기엔 언제나 불충분하다. 숲 속과 숲 밖이 다 어우러져야 숲이며 숲 속에서 길러지는 온갖 생명들, 그것들의 왕성함 없이는 숲은 또 미완성이다. 숲에 들면 얼른 내 옷을 받아 걸듯이 숲은 내 마음의 군더더기들을 나뭇가지 위에 차례로 받아 걸면서 앞장을 서거나 나를 앞장세운다. 숲이란 말처럼 공동체의 정의를 생각하게 하는 단어도 없으리라. 숲에서는 모든 생명체가 저절로 나고, 존재감으로 빛난다. 무슨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무슨 덩굴이 무슨 덩굴인지 잘 모르는 것들일수록 이른 봄에 일찍 새잎을 내고 꽃망울을 터뜨린다. 한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개체들에 비해 미미한 존재들일수록 일찍 서둘러 봄을 만끽하고 봄을 전파하는 것이다. 그리운 것들끼리 흔들리며, 서로의 발등에 발 뻗어보며, 부딪치며 비켜주는 계통과 순서 속에 마련된 자연의 배려와 조화로움이 있다. 세상에 허투루 온 생명이란 진정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되는 청미래덩굴 인동덩굴. 다래덩굴. 산딸기 덩굴. 찔레꽃 덩굴… 이 모든 덩굴들의 환함. 숲에선 생명을 가지는 한, 그것은 숲을 이루며, 스스로 숲이다. 무수한 빈 통로와 빈 길까지, 숲을 본향으로 둔 것들은 행복하다. 


글 ㅣ 황학주